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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9-12
  • 춘자 부천시 팰리스카운티 제2경로당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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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경로당에 앉아 있다.

새해를 맞이 하며 서로 서로 건강하자며 인사들을 나눈다.

춘자

내 옆에는 윤호영 님, 성계지 님, 민명언 님 등과 함께 총무님이랑 같이 앉아서 우스개 소리를 한다.

「제일 먹기 싫은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었으니 큰일이네」

「그래도 우리들은 다행이야, 아직은 건강하잖아」

「그래, 그래, 누구든 아프기만 해봐라」

와! 와! 모두들 웃는다.

모두들 지난 해는 어떻게 보냈는데 올해는 어떻게 보내지?

허허롭게 웃는 사람도 있다.

「이봐, 이봐, 내 지난 애기 좀 들어봐. 내 애기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여...」

나는 논도 몇 마지기 갖고 농사를 짓는 집안에 큰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첫딸이 태어났다고 예뻐하셨다. 시장에 다녀오실때는 갈치도 사오시고 과자도 사오시고 하셨다.

「춘자야. 너 땜에 생선 사왔다. 이 과자도 먹어봐라」

「에이그, 요년 내 딸, 귀여운 것」

어린날의 기억이 새롭다.

내 아래로 7살 터울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났다고 엄마, 아버지가 너무도 기뻐하셨다. 내 나이 12살이 되었고 남동생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마을에 열병이 돌았다.

염병이라고 하던가...

아버지가 열병에 걸려 4월달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5월에 어머니마저 열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시신을 가마니로 덮어 내어감에도 거적대기를 덮은 사이로 팔, 다리가 덜렁 덜렁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렇게 부모님을 땅에 묻었다.

남동생은 아버지와 엄마가 그렇게 떠나가셔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무서움에 질려 내 치마만 붙잡고 다닌다.

나는 내 동생을 가슴에 꼬옥 안고 펑펑 울음을 운다.

「저 어린것들을 어떻하누...」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찬다.

염병이 걸린 집이라고 사람들이 불태워 버린다.

「춘자야. 작은아버지 집에 가자.」

나와 내 동생은 작은아버지를 따라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아버지의 집도 넉넉하진 못하다. 거기에 사촌형제들이 일곱 명이나 되었다.

우리 아버지의 논이 있어서 그나마도 작은집에서 받아준 것이란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사촌형제들이 밥을 먹고 남은 찌꺼기를 내 동생과 부엌에서 나누어 먹었다.

누룽지라도 있으면 그 끼니는 배가 부르다.

추운 방에서 잠이 든다. 내 동생이 자꾸 운다.

「누나. 엄마 어딨어? 엄마 보고 싶어」

「누나. 배고파」

「이리와 봐. 찬물이라도 마시면 배가 덜 고플거야.」

나는 내 동생에게 물을 떠서 마시게 준다.

「이리와. 누나가 업어 줄게.

내 동생을 등에 업고 흔들어 준다.

나는 내 동생을 거의 등에서 업어 키웠다. 열두살 짜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동생이 무거우면 방 벽에 기대어 동생이 잠들 때 까지 서서 흔든다.

「엄마. 엄마. 아빠. 아빠」

훌쩍 훌쩍 동생이 자꾸 칭얼댄다.

눈물이 자꾸 흐른다. 동생을 업고 있어서 눈물을 닦을 수도 없다.

나는 빨래도 하고, 밥도 하고, 밭일도 나갔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보이면 나는 담벼락 뒤로 얼른 숨는다.

나도 학교 가고 싶다. 이이들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춘자야! 이년아! 빨리 오지 못해!」

작은어머니의 싸늘한 고함소리가 들린다. 내 동생은 누나 옆에서 잠시라도 떨어

지지 않는다. 내가 밭에서 일하면 밭고랑 근처에서 흙을 만지며 논다.

홀쭉한 볼, 울어서 얼룩진 얼굴. 구멍난 양말. 찢어진 검정고무신. 나는 내 발을 바라본다. 쩍-쩍 가라진 뒷꿈치. 맨발이다.

일년쯤 지났을 때 작은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에구구구. 저 재수 없는 년 때문에 집에 초상이 나는구나, 저년을 안 잡아 가고 왜 생때같은 내 남편을 잡아가나」

「저것들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내 동생을 등에 업고 오들오들 떤다.

「나가. 이년아! 너 동생 데리고 당장 나가」

우리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손주, 손녀니까 학교도 보내 줄거란다.

아들 논을 갖고 갔으니 공부도 시켜 줄거란다.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와도 나와 내 동생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 동생은 초등학교 밖에 못 다녔다. 나는 한글도 모르다가 야학이라도 다녀야지 하며 글을 배우러 다녔다.

「계집애가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거지, 글은 무슨 글이야」

할아버지가 야단치신다. 할아버지 몰래 살금살금 뒷굼치를 들고 방에서 나와 야학당에 공부하러 갔다. 호롱불을 켜놓고 글씨 공부를 하려고 하면 기름 닳는 다고 할아버지가 야단치신다. 겨우 내 이름 석자와 조금의 글을 읽을 수가 있게 되었으나,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두 달 밖에 다니지 못했다.

내 동생의 옷을 본다.

남의 집에서 얻어다 준 옷을 입었다. 바짓가랭이도 길고 소매도 길다. 찢어지면 내가 꿰매어서 입혔다. 밭에 나가 김을 메다가 먼 하늘을 바라본다.

「도망가고 싶어!」

「서울로 도망갈까?」

몇 번씩이나 마음먹어보지만 차마 남동생을 두고 떠나지 못했다. 할머니가 구박을 해도, 배가 고파도 꾸욱 참았다.

어느덧 내 나이 열여덟이 되었다.

내 동생이 11살 때이다. 도시락 한번 제대로 싸주지 못했는데도 다행이 아프지 않고 자라 주었다.

마을 한 가운데 동네 우물이 있었다.

아낙네들이 머리에 물통을 이고 물을 길러 다닌다. 처녀들도 물을 길러 온다.

우물터에서 여러 사람이 만나면 누구네 집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는 등 많은 말들이 오고 간다.

동네 사람들이 나에게도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의 땅을 할아버지가 갖고 계시니 남동생이라도 공부 좀 시켜달라고 해보란다.

할머니한테 동생 공부 시켜 달라고 말씀드렸다가 쫒겨날 뻔 했다,

「당장 나가라 이년! 밥먹여 키워 주었더니 공부라고, 당장 너 동생 데리고 멀리가라」

나는 할머니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겨우 할머니의 화를 가라 앉혔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찢어질 듯한 가슴의 통증. ‘내가 조금만 더 어른이었다면 아버지의 땅을 팔아 달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할아버지 할머니가 무서워서 말도 못했다.

우물가에서 만나 이웃집 언니가 내게 결혼이야기를 했다.

스물셋 되는 남동생이 있다나. 나는 열여덟에 무슨 결혼이냐고 펄쩍 뛰었다.

그 언니가 혼담을 듣고 할머니를 찾아 오셨다. 내가 참하다나.

할머니가 내게 시집가란다.

보릿고개가 심한 시절이라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시집가란다.

「난 아가요. 내 동생 때문에 못가요」

할머니에게 매달려 사정해보고 울고 또 울었다. 못간다고 나 못간다고.

「이년아,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니까 울지마라」

결국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시집이라는 것을 하고 와서 보니 기가 차다.

시아버지와 재혼해서 들어온 젊은 시어어니와 시누이가 넷, 시동생이 들...

젊은 시어머니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다가 남편이라는 사람은 장남이었다.

뼈가 빠지게 일해야 된다는 것이 이것이구나, 고추장이 맵다해도 시집살이 보다 더 매우랴!

내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다.

산같이 쌓이는 빨래.

함지박에 빨래를 산같이 넣어 머리에 이고 개울가로 빨러 갔다.

여름에는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겨울은 너무 춥다. 방망이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다.

그 시절 장갑이 있을 리 없다. 동상이 걸리고 손가락, 손등이 다 터진다.

다리미질을 해야 했다. 베틀에 올라 베를 짰다.

밥도 상에서 먹어보질 못했다. 아궁이 앞에 앉아 쪼그리고 김치 하나 얹어서 꽁보리밥을 먹었다.

내 아이와 함께 시어미의 아이도 내가 키우다시피 했다.

남편이 배를 타고 나가면 나도 같이 나가 그물을 친다.

그물에 꽃게, 물고기 등이 걸려서 올라오면 하나씩 떼어내어 함지박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팔러 나갔다.

뱃속에 아이가 있다. 임신해서 배가 부르다. 등에 아이를 업었다.

머리에 함지박을 이고 돌아다니며 소리친다.

「생선 사세요. 생선 싸게 드려요.」

큰소리로 외친다. 재수가 있는 날은 빨리 팔리지만 안 팔릴 때는 는게까지 돌아 다닌다.

「에구 저 아주메 좀 보소」

「애가 나오게 생겼네」

「에휴! 요놈의 세상」

한숨을 쉰다. 아무도 몰래 눈물을 훔친다.(닦는다)

아이를 다섯을 두었다. 딸 하나에 아들 넷이다.

큰 아들이 고등학교 삼학년때 남편이 심장마비를 덜컥 세상을 떠났다. 

술을 좋아 해서다.

내 나이 오십 둘 일때다. 

「아이구 여보! 애들 아부지야,

아이구, 아이구, 애들 다섯을 두고 가버리면 어떻하라구...

나눈 이제 어떻게 살라구 엉엉」

하염없이 울었다. 저 새끼들을 어떻게 키우나. 캄캄하다.

하늘이 노오랗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가보다.

나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야채를 팔기 시작했다. 생선도 팔았다.

시장구석에서 옥수수를 쪄서 팔았다. 오뎅도 팔았다.

아무거나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나는 밥을 하루 한끼만 먹었다. 내가 두끼, 세끼 먹으면 내 아이들 배가 고플 것 같아서였다.

초등학교 입구에서 야채를 팔기 시작했다. 좌판을 시장구석 땅에다 빌려놓고 깨끗하게 다듬어서 팔았다.

「야채 사세요! 많이 드려요!」

세월의 흐름이란 걷잡을 수 없는 것 이라든가.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의 고생을 아는지 잔병치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딸은 결혼을 했고, 둘째는 자그마한 사업을 하고 또 하나는 직장 다니고, 한 아이는 수학 선생이다.

모두들 자기 짝을 찾아 결혼하여 손주, 손녀를 내게 보여주었다.

막내 아들만 결혼을 못했다. 벌써 훌쩍 마흔을 넘었는데 말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뒷바라지를 하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알아서 스스로 좋은 대학에 갔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잘 커주어 항상 고맙고 그래서 항상 미안하다.

어느덧 나도 남편 곁으로 갈 나이가 되어 가나보다.

78세 이다.

나는 아침 7시면 집을 나선다.

나라에서 일자리를 준 것이다. 고맙기도 하다.

길 위의 휴지와 담배 꽁초를 줍는다.

오전 10시면 일을 끝낸다.

한달에 열흘씩만 일을 한다.

일이 끝나면 나는 운동을 하러간다.

아이들은 내가 일하러 가는 것을 모른다. 아침 운동을 나가는 줄 안다.

이젠 손주 손녀들 재롱과 커가는 모습을 보시란다.

뒤돌아 보는 그 많은 세월들, 덧없다는 것일까.

내 팔십 평생이 이것이구나.

모질디 모진 목숨 끊지도 못하고 달린 식구들 많아 참고 살아온 나날들 억척 같이 살아오다 보니 감기마져도 비켜 갔나보다.

경로당에서 접심을 먹고 여러 애기들을 하다보면 해가 저문다.

「집에 가서 막내놈 밥해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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