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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27
  • 천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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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해군에 지원 입대하여 1981년 전역했으니 제대한지도 어느덧 41년이 지났다.

1978년 4월 11일 진해 해군 신병 교육대에서 6주간 신병 교육을 받고 항공대원으로 편성되어 성남 신촌리에 있는 서울비행장에서 8주 동안 O-1항공기로 항공 기본 교육을 받은 후 우리 동기 20명 중 4명만 서울 비행장에 남고 나머지 16명은 포항 항공대로 갔다.

교육 중 귀동냥으로 듣는 말이 서울비행장이 근무하기 좋다고 해 남았으나 ‘때린 놈은 있는데 맞은 놈은 없을 정도’로 군기가 쎄 1개월 여 정신없이 신병생활을 하다 헬리콥터 한 대가 목포비행장으로 파견 나간다는 정보를 듣고 얼른 지원해 목포로 파견 가게 됐다.

난생 처음 헬리콥터를 타고 목포로 가는데 처음 헬기를 타 신기하기도 했으나 헬기가 많이 흔들려 속이 매스껍고 멀미가 날 것 같아 문에 있는 조그마한 공기 마개를 조금 열어 코를 대고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멀미까지는 하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고속도로 위 300여m 높이에서 목포 비행장을 향해 한참을 내려가다 헬기가 어느 시골 마을 위 약 2~30여m 상공까지 내려와서 두 세 바퀴 빙빙 돌자 헬기의 소음을 듣고 마을 남자와 아낙네들이 밖으로 뛰어나와 우리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신이나 모자를 벗어 흔들어 주다보니 언제 매스꺼웠냐 싶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고 성남을 출발한지 1시간 30여분 만에 목포 비행장에 안착했다. 내려 조종을 했던 분(소령이었는데 이름이 기억 안남)에게 오면서 시골 마을위에서 몇 바퀴 돌았던 이유를 물어봤더니 처가 동내라고 했다. 처가 덕분에 멀미는 면했지만, 재밌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내가 항공대에 근무하면서 난생 처음 헬기를 탔던 추억이었고 목포에서 군 생활 중 헬기는 아마 7번 정도 탔던 것 같다.

한번은 부대 타워로 빨리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고 타워로 급히 올라가니 무전으로 현재 헬기의 위치를 알려 주면서 아버지가 재직한  해남군 송지면 소재 학교 위치를 묻길래 좌표를 알려줬더니 아버지 재직학교 위를 몇 바퀴 돌고 왔다고 했다.

그 후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옆 학교 위에서 헬기가 빙빙 돌다 갔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당시 항공대장에게 애기했더니 그럼 같이 타고 가보자 해서 헬기를 타고 아버지 재직 학교에 가 운동장에 내리려 했으나 워낙 먼지가 많이 날려 학교 앞 논에 내려 관사까지 같이 간 적이 있다.

헬기에는 부조종을 했던 부장이 남아 있었고 나와 항공대장이 아버지께서 거주한 교장 관사까지 갔었다.

헬기가 학교 앞 논에 안착했고 갑자기 헬기가 마을에 내리자 동내 사람들이 신기한 듯 헬기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헬기의 뒷 테일로터는 1분에 3,000여회 회전하므로 눈으로 로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헬기에 대한 상식이 전무한 시골 사람들이 헬기 뒤편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 육안으로 쉽게 식별되지 않는 로터에 치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통제하는 사람 없이 부조종사만 헬기에 남겨두는 것은 실로 위험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목포 비행장에는 헬기를 넣어두는 격납고가 없었다. 태풍이 온다기에 우리 헬기를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대피하게 되었는데 우리집이 광주인지라 나보고 같이 가서 헬기를 지키라 하고 대장과 부장은 목포 비행장으로 귀대했다. 

난 격납고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헬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그냥 집에서 언제 태풍이 끝나나 온통 뉴스에 관심을 갖고 있다 3일이 지난 후 태풍이 자자든다는 뉴스를 보고 송정리 비행장에 갔더니 웬걸 격납고에 있어야 할 헬기가 없는 것이었다. 놀라 부대로 전화했더니 어제 헬기를 타고 부대로 귀대했다는 것이었다.

낮에 헬기를 지키라는 명령을 어긴 죄로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들 마음이 좋아 다행히 맞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번은 헬기를 타고 섬에 있는 해군기지를 갔다 온 일이 있는 데 얼마나 피곤했던지 올 때 그만 잠이 들어 앞좌석에서 조종하는 대장이 나를 깨우려고 헬기를 이리 눕히고 저리 눕혀도 내가 곤히 잠자더라고 했다.

헬기는 목포 부대에 착륙했고 그때 까지 나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헬기를 유도했던 한*석 하사관이 나를 깨우는 바람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대장님이 조종을 하는데 쫄따구가 잠이나 자냐’며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또 한번은 헬기에 이상이 있어 정비를 마친 후 시험비행을 한다며 타라고 해서 뒷좌석에 탔는데 한참을 높이 올라가더니 그만 급강하를 하는 것이었다. 아마 100여m를 헬기가 급강하 하는 시험 비행을 하는데 정말이지 으스스 간이 떨어진 줄 알았다. 시험비행을 마치고 내려와 대장이 우스갯말로 ‘이렇게 하면 여자는 오줌을 싼다, 그래도 죽지 않았네’ 하면서 나를 놀렸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유*식 대장이 섬 기지에 다녀오다 비행장 옆 갈대밭 10m 상공에서 멈춰 있길래 헬기 쪽으로 쫓아가 보니 갈대밭에 꿩 새끼들이 엄청 쎈바람 때문에 도망가지 못하고 움츠리고 있어 몇 마리 잡아 온 적도 있고, 뜸부기 한 마리를 비행장 옆 울타리에 몰아붙여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을 헬기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잡아 온 적도 있다.

잡아온 뜸부기를 철사로 만들어진 새집에 넣어두었더니 이리 날고 저리 날아 몸 전체가 상처투성이가 되어있는 것을 본 유*식 항공대장이 불쌍하다며 다시 창공에 날려 보내 준적도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목포 3해역사 최*화 사령관이 ‘뜸부기를 과 먹으면 창호지도 뚫는다는데 그 좋은 것을 그냥 보냈냐’고 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진짜 뜸부기가 남자에게 좋은 음식인가?

또 군 생활 중 잊지 못할 추억이 생각난다. 우리 부대는 비행장에 있는 관계로 사령부와 많이 떨어져 있었고, 부대 옆에 공터가 많아 염소, 오리도 키워보고, 호박, 무, 배추도 심어 먹었던 추억이 생각 난다. 한번은 강*영 항공부장이 오리의 목을 베 그라스에 피를 받아먹겠다며 나보고 목을 베라고 지시했다. 심성이 고운 나로서 도저히 산 짐승의 목을 칼로 벨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명령을 거절할 수 없어 같이 복무했던 하사가 오리 몸통을 잡고 난 눈을 꼭 감은 채 난생 처음 산 오리목을 베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군대니까 가능했겠지...

한번은 이*태 상사가 크리스마스 때 잡아 파티하겠다며 칠면조 새끼 몇 마리를 목포에서 사와 키웠는데 얼마 가지 않아 모두 죽고 말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우리 부대는 본부기지항공대 서울비행장 소속으로 목포에 처음 헬기 한 대가 파견나간 상태로 항공대장은 2개월, 항공부장은 1개월에 다시 성남 신촌리에 있는 서울비행장으로 파견생활을 마치고 옮겨가는 바람에 대장과 부장은 목포 비행장에 온 것을 마치 휴가 온 것인냥 좀 쉬었다 가는 곳으로 생각하는 듯 보였다.

이 후 처음 항공파견대 창설 때 내려 왔던 유*식 항공대장이 본부로 갔다 다시 내려온 후 앞으론 계속 목포에서 근무하겠다고 해 이후 대장은 바뀌지 않고 부장만 돌아가면서 교체되어 다녀갔다.

유*식 항공대장은 해군 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하사관을 거쳐 영관 장교까지 승진한 분이다. 곧은 성품과 밭 하나를 갈더라도 직각으로 땅을 골라야 할 정도로 군인 정신이 투철했으며, 부하 대원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훌륭한 군인이었다. 난 유 대장으로부터 매사 꼼꼼하게 일 처리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내가 다쳐 광주통합병원에서 수술하고 4여개월 동안 입원치료한 후 진해에 있는 예비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유*식 항공대장이 나에게 전화를 해 ‘이제 제대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시 목포 비행장으로 왔으면 한다’고 해 서울비행장으로 가서 남은 군생활 마무리 할까 했는데 유 대장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다시 목포 비행장으로 가 제대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서울비행장으로 가서 제대했다면 지금 그 때 같이 근무했던 분들과 지금처럼 같이 모임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78년 처음 목포 항공파견대가 생겨 소령(유*식) 1명, 대위(하*종) 1명, 상사(이*태) 1명 중사(신*인, 서*호) 2명, 하사(한*석) 1명, 병(김*영, 천*선) 2명 이렇게 8명이 파견되어 헬리콥터 1대를 운용하면서 부대 분위기가 가족처럼 좋았다. 이 후 김*윤 대위, 김*중 동기가 서울비행장에서 목포로 파견 왔다.

이 후 목포 항공대는 헬기도 늘어나고 부대 대원도 늘어나 가족 같은 분위기는 차차 찾아보기 어려워 졌다.

목포 바다 건너편 영암 용당에 있는 목포 비행장은 옛날 민간에서 사용했던 비행장으로 활주로가 대략 1km 쯤 됐을까? 타워시설이 갖춰져 있는 조그마한 옛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 병사 숙소를 꾸미고, 조그마한 사무실도 꾸려 1여년을 생활하다 300여m 떨어진 위치에 새로 건물을 짓고, 격납고도 지어 이사를 가게 됐다. 새 건물은 VIP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시설로 지어졌다. 또한 부대 바로 앞에 정자를 지어 여름 주말이면 가끔 그곳에서 부대원들이 막걸리로 시름을 달랬던 기억도 생생하다.

한번은 주말에 사령관 친구분들이 우리 부대에 놀러와 정자에서 회를 안주 삼아 술을 먹으면서 나에게 와사미가 담겨있는 그릇을 주면서 간장을 떠오라고 해 회를 먹지 못한 나였기에 와시미가 뭔지도 모르고 그릇에 있는 와사미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 간장을 떠다 주었더니, 최*화 사령관 왈 “와사미는 어떻게 했냐?”고 묻길래 버렸다고 했더니 “시골 촌놈이구먼”이라며 한 마디 했던 기억이 난다. 옆에서 이 걸 지켜보고 있던 우리 유*식 항공대장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사령관 앞에서 부하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때의 추억이 새롭다.

헬기를 타고 온 사람이 주로 별 1개에서 3개까지로 기억되며, 한번은 현대 정 회장 전용기도 우리 비행장에 들른 적이 있었다.

접견실은 중견회사 회장실 못지않게 꾸며졌고, 목욕탕은 도시 어느 목욕탕도 부럽지 않을 정도의 시설로 지어져 가끔 주말이면 사령관이 친척 또는 친구 분들을 초청해 목욕하고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말에 편히 쉬어야 될 텐데 사령관이 목욕하러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물을 데워 탕에 가득 채우고 새 런닝셔츠, 팬티, 양말까지 준비해야 하는 번거러움을 감내해야 했었다.

또한 강*영 부장과 함께 근무할 때 이분은 어찌나 낚시를 좋아했던지 주말이면 나보고 낚시 밥 지렁이를 잡아오라고 해 지렁이만 봐도 징그러워 도망가기 바쁜 내가 군대에서 어쩔 수 없이 밭에 가 지렁이를 잡아다 주었고, 부대 인근 바닷가로 따라가는 바람에 주말 쉬지도 못해 마음속으로 불만이 컸다. 지금 낚시를 싫어하게 된 동기가 그 때문이었나 보다.

동기 김*중이와 서울비행장에서 함께 근무 할 당시 우리 졸병은 주로 곤히 잠에 빠져들 시간인 새벽 2~3시 사이 한시간씩 보초를 섰는데 둘이 함께 두 시간을 같이 보초를 섰을 정도로 친했다. 한번은 김*중이가 휴가를 받아 목포 비행장에 온 적이 있었다. 마침 목포 비행장에 병 한명을 충원해야 할 상황임을 알고 목포에 내려온 것이다. 동기인 나에게 목포 생활이 어떠냐고 묻길래 서울 비행장보다 좋다고 했더니 그럼 나도 목포 비행장으로 오면 어떻겠냐고 해 올 수 있으면 오는게 좋을 거다 했고 얼마 후 김*중이도 목포 비행장 소속이 되어 함께 근무하다 같은 날 제대하게 됐다.

초창기 근무했던 유*식 대장, 김*윤 부장, 한*석 하사, 김*영, 김*중 수병과 나 이렇게 6명은 ‘유사모(유*식을 사랑하는 모임)’라는 모임을 만들어 지금도 서로 연락하고 만나고 있다. 

유*식 대장님은 중령으로 전역한 후 대한항공 부기장을 거쳐 기장까지 하시다 퇴직해 공기 맑은 고창읍 석정리로 이사가 즐거운 삶을 사시고 계신다. 목포에서 군 생활 중 간첩선이 목포 부근까지 왔을 때 상공에서 우리 헬기로 추적하여 함정에 위치를 알려 간첩선을 잡은 공로로 ‘인헌무공훈장’을 받고 중령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김*윤 부장은 목포 출신으로 항공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해군 소위로 입대하여 대위로 예편한 후 대한항공 조종사로 채용돼 수석 기장으로 퇴임하고 지금은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한*석 하사는 부산이 고향이고 원사로 전역한 후 김포에서 노후를 즐겁게 보내고 있으며,

김*영 선배는 전주가 고향이고 전북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지금은 중국에서 보트 제조회사 대표로서 사업에 성공한 케이스다.

또한 동기인 김*중은 전북 부안이 고향으로 방송대 중국어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방부에서 정년퇴직하고 현재 군 보안관련 사업 대표로 활동 중이다. 

모두 인품이 좋아 군대에서 맺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군 재대하고 같이 군 생활을 한 장교와 하사관 그리고 병이 함께 모임을 만들어 40여년 계속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마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유일하지 않을까? 서로 애경사도 챙기고, 년 1회 정도 함께 모여 식사도 하고 있다.

내가 군 제대한 해가 1981년 이니까 유수와 같이 세월은 흘러 어느덧 41년이나 됐다. 참 세월은 빨리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랑하는 ‘유사모’ 모든 회원들의 건강과 가내 행복을 빌어 본다.

[사진으로 보는 지난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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